잡다한 관심사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kaverin 2010. 8. 20. 09:42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

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나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

      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