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관심사

[펌]흥선 대원군에 대해

kaverin 2012. 8. 9. 20:16



원 출처는 이곳: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70061&RIGHT_KIN=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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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이하응. 남연군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한 대원군이다.

 


소년기의 흥선군은 이름난 수재였다. 
김정희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서 서예, 그림, 글씨 등을 두루 배운다.
그러나 어머니 맏형 아버지가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고아가 된다.

 

1834년 정3품의 작위를 받고 흥선도정으로 승진한 뒤에, 흥선군으로 승진한다. 
그후에 별 영향력이 없는 직책을 지냈다.


안동 김씨측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등 수모를 당하며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세를 한다.

 


암튼 
대원군은 이런수모를 당하면서도  철종 다음을 노리면서 조대비 (세도가문이었던 풍양 조씨로, 왕실에서 가장 높은 어른) 에게 접근한다.

 

결국 작전은 성공해 철종이 사망한 후 1863년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12세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 
이후 섭정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세도정치기엔  삼정 문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유랑민이 늘고 경제가 갈수록 나빠져,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는 경향이 1862년 최고조에 달했다.

 

흥선 대원군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개혁을 한다. 
양전사업(토지조사)을 실시하고 은결(숨겨진토지)을 색출해 전정을 개혁했다.


군정을 개혁하기 위해 사람이 아닌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한다. 
하지만 호포제는 경복궁 건설비를 위해 실시하게 된 경향도 있다
이에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흥선 대원군왈" 닥쳐~!"

 


암튼 이런 개혁으로 세금이 확연히 늘어났다.


또한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에 수령과 아전들의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지역의 덕망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를 실시하게 했다.

 


흥선 대원군은 이전까지 집권하고 있던 세도정치가들도 몰아내야 했는데.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 기관.

 

이 때문에 세도가문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남인 등 권력 소외 계층, 왕가 종친 등을 끌여들여 세도가문의 위세를 꺾는 데 성공했다.

 


또한 대규모로 서원을 철폐시켰다. 
서원은 이전까지 제사비용 등을 농민에게 물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사액서원들의 면세권을 이용해 양반들이 땅을 서원에 맡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등 폐단이 심했다. 
유생들이 집단시위를 펼쳤으나,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와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남쪽으로 밀어내 버린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경복궁을 중건한다.
이에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거두며 재원을 마련했고 농민들을 무보수로 대거 동원시켰다. 
이 사업은 양반들은 물론 백성에게까지도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그가 퇴진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흥선 대원군은 국방력 강화에도 신경을 썼다.
훈련도감의 조총수를 늘리고, 말을 수입하고, 최신식 총을 수입하려고 노력했으.......나.. 실적은 시원찮았다.
그나마 그럭저럭 효과가 있다고 할 만한 것은 면제배갑 정도.

 

 

 

1864년 동학창시자였던 최제우를 혹세무민죄를 물어 잡아 죽였다. 
이 문제는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반면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아내, 큰딸, 고종의 유모까지 천주교 신자였다. 우왕ㅋ굳ㅋ 
러시아의 남하에 이이제이 정책으로 대응하려 했고, 이에 그는 프랑스와 교섭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왈 "우리는 종교인들이지 정치인들이 아님요~!"라며 대원군의 의견을 단칼에 거절....헐!

 

안 그래도 천주교를 배척하던 여론은 흥선 대원군에게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부추겼고, 때마침 청이 서양에 의해 좌지우지당하고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안감을 느낀 그는 1866년 80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도들과 9명의 선교사를 처형한다...일명 병인박해 
이때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마라 라는 명을 내려 고아들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 난리통에 살아난 선교사 리델은 베이징 주둔 프랑스 극동 함대에 연락한다. 
프랑스 극동 함대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출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한성근부대와 문수산성에서 전투를 벌이고 양헌수부대와 정족산성에서 전투를 벌인뒤 진군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된다...일명 병인양요

 


1868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주도한 140여명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시도했다...일명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 사건을 알게된 흥선 대원군은 더더욱 분노해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삼아 1871년 로저스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온 것.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강화도를 점령한 미군은 흥선 대원군에게 '300명이나 죽었다. 그냥 수교하자'라는 문서를 보냈지만... 
흥선 대원군의 답변은 '닥쳐~! 수교? 몇만명이 죽어도 안 한다' 
이에 미군은 물러간다....응?

 


전투결과는 패배에 가까웠지만, 어쨌건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서양세력을 몰아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맡게된 후에는 조선군의 기강과 무장상태는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 결과 병인양요/신미양요 때보다 훨씬 적은수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후 망국을 맞게 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논란이 많다.  
조정도 개항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암튼
이후 고종은 병력확충을 노력했지만 애초에 전력차는 심각했다.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여론(특히 양반들)은 악화되어 있었다. 
1873년 고종이 22세 되던 해, 경복궁 중건 반대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은 고종이 친정할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친정을 선포한다. 
이후 권력은 명성황후 민씨를 필두로한 민씨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후 삼정을 예전대로 돌리고 서원을 복원하는 등 흥선 대원군의 사업을 정면 부정한다.

 

 

 


권력에서 물러난 흥선 대원군은 얌전히 앉아있.........을리가 없지...

 


고종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기도한다....일명 이재선역모사건 
그러나 1881년 중간에 걸리면서 일망타진.. 서자인 이재선과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 사형당하고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면책.

 

그뒤에는 장남 흥친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실패. 
이때는 흥친왕도 고종의 친형이었으므로 모두 면책.

 

그 뒤엔 손자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기도한다.

 


1882년, 임오군란때 잠시 재집권해 권력회복을 꾀했지만 명성황후 민씨가 청에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에게 연락하여 청군이 그를 청으로 압송해간다. 
재집권 33일만의 일이었다.

 

1885년 러시아와 연결하려는 민씨정권을 견제하기 위한 청의 의도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민씨 정권의 견제 때문에 정권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1887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공모,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면(흥친왕)을 또 다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쿠데타 시도만 3번째...ㅎㄷㄷ..고종의 아버지만 아니였으면 삼대가 멸했을것이다...

 


이 사건으로 고종과 대원군은 크게 척을 지게 되고, 고종은 왕족을 측근에서 배제한다. 
이후에도 대원군계파는 고종의 반대세력으로 할동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연계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였다.

 


제1차 갑오개혁때 일본이 흥선 대원군을 집권시켰으나 그냥 얼굴마담 일뿐...
이후 2차 내각이 구성되면서 흥선 대원군은 물러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때 갑작스레 궁으로 끌려갔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을미사변이 있기 몇일전에 일본 공사 오카모토가 칩거중인 대원군의 집에 찾아가 을미사변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 각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으로는 대원군과 고종이 궁중을 감독하지만, 내정에서는 내각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원군이 을미사변에 대해 묵인 혹은 이용당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주동자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1898년 1월 부인의 죽음을 보고 그도 2월에 사망한다. 
을미사변의 일로 고종과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라, 고종은 장례식에 참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는 고종의 형 흥친왕이 알리지 않았다고 하나, 알렸을때  후환이 두려워 안 알렸다고 하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암튼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과정에서 왕족은 분열되었고, 고종에 대립했던 대원군계파는 황당하게 이후 친일파가 된다.....응?

 

 

 

 

 

 

 

 

기타이야기..


흥선대원군이 재야에 있을때 수모를 당했던 몇가지 일화.


화양서원 몰매사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신위가 있는 만동묘에 참배를 하러갔다가 남루한 옷차림 덕에 하인에게 몰매를 맞았다.
이하응은 서원을 관장하는 변장의에게 "감히 왕족을 때리다니! 저놈 조지셈!"이라 했으나 "하인은 해야할 일을 한것뿐임!"이라며 거절당한다. 
당시 이하응이 얼마나 같잖게?? 보였는지 알수 있는 사건.

고종집권후 변장의는 왕족모욕죄로 말그래도 맞아죽었다.....응?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병기도 수시로 모욕을 주었다. 
어느 잔칫집에 이하응이 나타나 잔칫상을 요구하자 김병기는 "거렁뱅이 상갓집 개한테 진수성찬도 호사다."라며 자기가 먹던 고기 뼈다귀를 이하응에게 던져 주었다. 당시 이하응은 그냥 웃고 넘겼다고 한다...


훗날 권세를 잡자 김병기의 잔치에 참여, 독이 들었다는 이유로 먹던 음식을 뱉었다. 
대원군 음식에 독을 탔다는 의심을 사게 된 김병기는 그 자리에서 이하응이 뱉은 음식을 주워먹어 위기를 모면한다.
이 기지에 감탄한 대원군은 훗날 아들을 낳으면 김병기같이 낳아야 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안동김씨 문중 식객 심의면은 이하응에게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하했는데 
행사에 온 그에게 뭐하러 이런 곳에 오느냐며 면박을 줬다.
뒤에 심의면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광주군수직에서 파면되고 벼슬에서 잘렸다.

 

혹시 주변에 바보같은 친구가 있다면 괄시하지 말고 잘 대해주자.....응?

 

 


이하응이 기생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군금별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이때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의 외상술이나 먹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뒷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장렴을 불러 "또 내 싸닥션 한번 갈겨볼텨?" 하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께서 기생의 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려 이장렴을 대접했다고...... 대원군도 대인배지만 이장렴도 쫌 용자인 듯...ㅎㄷㄷ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청의 사신은 경복궁을 보고 이거 짓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대원군에게 물었다. 
대원군은 약 3년 정도 걸렸나? 라고 대답하자 청의 사신은 "이 정도 건물은 우리나라는 1년이면 지어낸다"며 대원군을 벙찌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청의 사신은 또 짓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는데 대원군은 1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했다. 
이번에 사신이 또 "이 정도는 몇 달이면 다 짓는데 ㅋㅋㅋ"라며 또 대원군을 열받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다다르자 사신이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다.. 
이 때 대원군왈 "이 문은 오늘 아침에도 없었소이다!"

 

 

한 선비가 대원군에게 벼슬자리를 청하고자 방문했는데 선비는 대원군을 보고 절을 올렸다. 
대원군은 그냥 대충대충 대했다. 
그러자 선비는 다시 한번 대원군에게 절을 올렸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을 두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일.

열받은 대원군은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냐?"라고 화를 내자 선비는 천연덕스럽게 "처음절은 인사를 올리는 절이었고, 두번째 절은 물러가겠다고 올린 절이옵니다"라고 받아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대원군은 이 선비에게 한 자리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어느날 대원군에게 한 무관이 찾아왔는데, 때마침 조대비(신정왕후)의 친척이 찾아와 청탁을 했다. 
조대비의 친척은 대원군에게 "마침 백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니 그 자리에 저를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조대비 친척이 말한 황해도 '백천'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이라고 읽었다. 
어이가 없어진 대원군이 기본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방 안에 방귀 소리가 났다. 
그 방귀는 무관이 낀것이었는데 무관은 자신이 낀줄도 모르고 조대비 친척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큰 방귀 소리를 내느냐"며 성을 냈다. 
그런데 이 친척은 아무 변명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와서 식사를 들게 했는데 친척은 또 체면치레 하느라고 좀처럼 먹지 않았고 무관은 "제가 가난하게 살아서 이런 진수성찬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러고 대원군에게 "제게 늙으신 부모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얼마전 배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고 들었는데 소인을 거기 보내주시면 열심히 일하며 부모님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했다. 
대원군은 이 무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힘써 주겠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조대비 친척이 "대원위대감,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대원군왈. "제 밥그릇도 찾아먹지도 못하고, 방귀 뀌지 않고서도 방귀 뀐 것처럼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자네 같은 자를 군수로 쓸 수 있겠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어떤 선비가 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왔다. 
그런데 이 선비가 좀 '아는 척, 잘난 척'을 했는지 대원군은 선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원군이 문득 "자네 처가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선비는 또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황씨 문중에서 아내를 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 왈, "항문이라니. 자네는 똥구멍에 장가를 들었단 말인가?".

 

 

 

이하응이 불우했던 시절.. 아무대가도 받지 않고 그 집에 땔나무를 해다 준 한 나무꾼이 있었다. 
이를 잊지 않던 그는 대원군이 된후 이 나무꾼을 연회에 초대했는데, 조정의 고관들과 장안의 부호들까지 초대했고 이 연회에서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나무꾼을 앉혔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그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나무를 해다 줄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거면 고개를 저으라고 하자 나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대원군이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자네 어머니께 내 수청 좀 들게 하게"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나무꾼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대원군이 계속 이 청을 하자 결국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연회장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대원군은 이 나무꾼을 버선발로 쫓아가며 청을 했으나 나무꾼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이 나무꾼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가져온 부호와 고관들의 하인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연회석에 있던 고관 부호들이 '대원위께서 저리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분명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거나 대원위의 측근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나무꾼에게 아부할 생각으로 재물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자기 재물은 한 푼도 안쓰고 그 나무꾼에게 보답을 한 셈.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아부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씁쓸한 에피소드다

 


대원군은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워 난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귀찮아진 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원군 작품으로 알려진것들이 조사 결과 다른 화가들이 그린 난초고 낙관만 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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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이라 무조건 펌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