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왕년에 로저 젤라즈니 빠순이였던 본인은, 젤라즈니 사마의 신작이 출간됐단 소식을 보고도
한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더랬다. 돈도 아껴야 했거니와 나이를 먹으니 점점 뇌용량이 저질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심각한 책들은 들쳐보기도 귀찮았거든. 하지만 추석연휴를 맞아서 식구와 친척들이
들끓는 집안에서 책으로라도 피신하자는 생각으로, 백만년만에 제대로 된 소설책을 구매
하기에 이른다....두둥!!

허접한 리뷰를 작성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을 기획하고 번역한 분이자, 로저 젤라즈니의
책을 우리나라에 계속 소개를 해오신 김상훈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기분이다. 젤라즈니가
나름대로는 우리나라에 마니아층이 많이 형성됐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선 불모지나 다름없는 sf작품, 그것도 아시모프나 아서 클라크같은 잘 알려진
작가의 책도 아니기 때문에 선뜻 기획하고 내놓는데에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법 하니
말이다..(아님 말고.=_=)

일단 책의 전반부 줄거리는 이렇다.
-내가 직접 간추리는게 귀찮은 관계로, 김상훈님이 써 놓으신 줄거리 소개를 올려버리겠다 잇힝~

20세기에 나바호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주인공 빌리 블랙호스 싱어는 인디언 특유의 능력을 살려
뛰어난 사냥꾼이 되며, 인류의 외계생명탐사가 보편화된 뒤에는 희귀한 외계동물의 포획자로 명
성을 떨친다.
우주여행에 필수적인 냉동 수면과 고도로 발달한 의학 기술의 수혜를 입은 덕택에 싱어는 여전히
장년의 강건한 육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마지막 사냥을 끝내고 고향인 지구로 돌아왔을 때는 상대
성 이론의 시간지연 효과에 의해 이미 17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고, 그가 속한 씨족 또한 소멸하고
없었다. 싱어는 몇십년 단위로 귀향할 때마다 낯설어지는 지구의 환경에 적응하는 구심점이 되어준
나바호족의 전통 문화가, 구성원인 그조차도 더이상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절망감을 곱씹으며 고향의 황야에서 조용히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싱어는 유엔 사무총장 보좌관으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는다. 변신 능력을 가진 외계인
스트레이지인과 인류 사이의 외교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스트레이지인의 광신도 집단이 특수한
종교적 훈련을 통해 '벽을 통과하는'초능력을 갖추게 된 암살자를 지구로 파견해서 유엔 사무총장
을 암살하려고 하는데, 외계 생물 포획 전문가인 싱어가 그것을 막아 달라는 얘기였다. 이것은
싱어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지만, 문득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외계생물 '캣cat'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

그리고 오랜세월 갇혀있는 동안 고도의 인식능력을 가진 지적생물체로 성장해버린 캣은
암살자를 잡는데 협조하는 대신 빌리에게 그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해온다.

-사실 이 부분까지 읽었을 땐 난 이 뒷부분으로는 암살자를 뒤쫓는 빌리와 캣의 손에 땀을 쥐는
스팩터클한 모험담이 펼쳐지게 되는 줄 알았다고 고백하겠다.
근데 소설은 내 기대를 홀라당 배신하고, 암살자는 참으로 허무하게 캣에게 제거가 된다.
그리고 삶에 의욕이 없었던 빌리는 자신의 목숨을 순순히 내놓으려고 하는데, 사냥의 재미를
느끼고 싶었던 캣은 빌리에게 도망을 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도주를 하는 빌리와 추격을
하는 캣, 이게 이 소설의 본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소설은 참으로 난감하게도, 매우
난해하고 관념적인 영역으로 점점 흘러가게 된다....아놔.

같은 작가의 전작인 장편 '내 이름은 콘라드'나 '신들의 사회'이 소설전반에 넘치는 마초이즘,
그러면서도 지극히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던 걸 생각하면 -후기작에 속하는-
이 소설에서의 젤라즈니의 스타일의 변이는 참 의외스럽다.
주인공 빌리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패배한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리고 캣은 나바호족 신화의 친디(악령)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의 용서받지 못한 과거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적대적 자아이기도 하다. 친디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선 또한 자신의 과거와의
화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한 빌리의 여정은 하시시를 마신 것처럼 매우 몽환적이고,
마치 알타이 샤먼의 접신체험이랄까 천계로의 여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마 젤라즈니의 전작의 팬들 중에는 이런 작가의 스타일 변화가 불만스러웠던 분들도
있던 듯 하다. 하지만 난 이 작품도 이것대로 정말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젤라즈니의
작품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그리고 젤라즈니가 이제는 고인이 되셔서 더이상은 신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